이재명의 공정과 윤석열의 공정-전우용 박사의 칼럼

논설·칼럼·SNS / 시사타파 / 2022-02-04 19:38:00
- 가난한 어린시절 보낸 이재명후보 늘 억강부약(抑强扶弱)’정의관 설파.
- 그는 우리 사회의 불공정한 ‘공정의 기준’을 바로잡을 수 있는 사람.
- 대통령선거“어떤 공정을 선택할 것인가?”역사적 질문에 답하는 일.
- 시민들 각자의 대답이 곧 다가올 "우리의 미래를 결정" 한다.

2019년 여름,

윤석열 씨의 지휘를 받은 검찰이 전 청와대 민정수석 조국 씨의 법무부 장관 취임 및 직무 수행을 저지하기 위해 그 일가 친척 전원을 대상으로 사상 유례 없는 표적 수사를 자행한 이래, 공정’은 우리 사회의 화두(話頭)이자 일종의 ‘시대정신’이 되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이 조국 씨 자녀가 ‘불공정한’ 방법으로 인턴 증명서를 발급 받아 대학에 진학했다거나 표창장을 위조하여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했다는 언론 보도를 보고 분개하면서도, 검찰권 행사가 ‘공정’했는지, 조국 씨 일가가 겪은 일들이 ‘공정’한 징벌인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표적 수사와 별건 수사를 거듭하여 휘하 검사들로 하여금 ‘표창장 위조’라는 희대의 죄목으로 조국 씨 부인을 기소하게 했던 윤석열 씨는 일약 ‘공정’의 아이콘으로 떠올랐습니다.

그는 판사 사찰, 감찰 방해 등의 행위로 징계를 받자, 검찰총장 직을 사퇴하고 대선 출마 의사를 밝히면서 ‘공정, 정의, 상식’을 구호로 내세웠습니다. 그의 지지율은 한때 50%에 육박할 정도까지 치솟았습니다.

최근에 윤석열 씨 부인이 이력서에 경력을 허위로, 또는 과장하여 기재한 사실이 밝혀졌어도, 윤석열 씨를 ‘공정의 아이콘’으로 추켜세웠던 사람들은 이런 행위들을 별로 문제 삼지 않습니다. 지금 ‘공정’에 대한 우리 사회의 판단 기준은 심하게 분열해 있습니다. 정치적 분열도 중요한 이유이지만, 그보단 ‘공정’이라는 개념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데에서 기인한 바 큽니다.

‘공정’이라는 개념이 누구에게나 명료히 인지되는 것이라면, 지금처럼 아전인수 격으로 적용하기는 쉽지 않았을 겁니다. ‘공정(公正)’은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는 단어지만, 그 개념을 간단히 정의하기는 어렵습니다. 국어사전은 ‘공정’을 ‘공평하고 올바름’으로, ‘공평’을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고름’으로 정의합니다. 하지만 당장 ‘치우치지 않음’이나 ‘올바름’의 준거는 시대에 따라, 또는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예컨대 19세기 중반까지는 권투 경기에 체급이 없었습니다. 현대인들은 이런 경기를 ‘불공정’한 시합이라고 생각하지만, 당대인들은 그런 경기의 ‘공정성’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현대 한국인들은 아파트 입주민이 경비원을 폭행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불공정한’ 일이라고 분노하지만, 19세기 중반의 조선인들은 양반이 노비를 학대해도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현대의 한국인 중에도 입주민에게는 경비원을 학대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자 ‘공(公)’은 본디 ‘지상에 구현된 하늘의 도리’라는 뜻이었습니다. 중세인들은 ‘공정’을 ‘하늘이 정한 원칙’으로 이해했습니다. 중국인들이 ‘법에 따름’이라는 뜻의 영단어 justice를 ‘공정’으로 번역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법은 ‘신의 율법’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justice는 ‘정의’로도 번역됐습니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하늘의 뜻, 또는 천명(天命)에 따르는 것이 ‘공(公)’이었고, 그와 무관한 것이 사(私)였습니다. 사람들의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좌우되지 않는 절대적이고 바른 원칙이 ‘공정’이었습니다.

‘신의 의지’에 대한 보편적 믿음이 약해지면서, 과학이 종교의 역할을 대신하기 시작했습니다. 더불어 ‘공정’의 기준도 ‘과학적 법칙’이 정하게 됐습니다. ‘자연법칙’이나 ‘역사 발전의 법칙’을 발견하려는 지적 노력이 활발해졌고, 많은 ‘과학자’가 나름의 ‘법칙’들을 제시했습니다. 그것들 중 현대인의 의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진화론’이었습니다.

1859년에 간행된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은 생물학보다도 사회과학에 더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약육강식, 우승열패, 적자생존의 ‘규칙’에 따라 진행되는 ‘생존경쟁’이 생명체 진화의 ‘동력’이라면, 그것이 인간 사회 발전의 ‘동력’일 수도 있다는 생각, 이른바 ‘사회진화론’이 널리 퍼졌습니다. 사회진화론은 초기 자본주의 시대의 사회 상황, 제국주의 시대의 세계 상황을 합리화하는 데 적합했습니다.

왜 똑같이 ‘사람’으로 태어났는데 누구는 엄청난 부자가 되어 아무 일도 안 하면서 호의호식하고, 누구는 평생을 쉬지 않고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왜 똑같은 ‘사람’으로 태어났는데 어떤 민족은 타민족을 지배, 수탈하고 어떤 민족은 타민족에게 모욕과 학대를 당하는가?

‘사회진화론’은 이 질문에 ‘경쟁력’이라는 답을 제시했습니다. ‘생존경쟁’에서 승리한 자가 패배한 자를 지배, 수탈, 학대, 모욕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단순한 논리였습니다.

이 논리는 생존경쟁에서 패배한 인간 집단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하는 것이나 대량 학살을 당하는 것도 일종의 ‘자연법칙’이라는 생각을 정당화했습니다. 이런 논리가 ‘진리’처럼 통용되는 세상에서는, ‘힘 만능주의’와 ‘능력지상주의’가 활개치기 마련입니다. 노골적이고 제한없는 경쟁이 전쟁입니다. 인류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고서야, 인류라는 ‘단일종’에 진화론을 적용하는 것이 얼마나 참혹한 일로 귀결되는지 깨달았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노동 인권 사상과 민족자결주의가 고조되었던 것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엔이 「세계인권선언」을 선포한 것도, 사회진화론적 사고에 대한 반성의 결과였습니다.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생존을 위해 경쟁하는 동물이 아니며, 인간은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는 인도주의가 새로운 시대정신이 됐습니다.

그러나 반성의 효과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1980년대부터 ‘신자유주의’가 부상(浮上)하여 사회진화론을 재소환했습니다. 능력지상주의, 힘 만능주의가 다시금 횡행했고, ‘승자의 배타적 특권’을 당연시하는 문화가 만들어졌습니다.

근래의 컴퓨터 게임들도 이런 가치관과 인간관을 강화하는 구실을 합니다. 강력한 무기 아이템을 장착한 상위 레벨의 캐릭터들은 하위 레벨의 캐릭터들을 ‘사냥’합니다. 사용자들은 레벨업을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자하며, 상위 레벨 캐릭터가 하위 레벨 캐릭터를 ‘사냥’하는 ‘가상현실’을 즐깁니다.

이런 가치관과 인간관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레벨업 과정의 공정성 여부만을 문제삼을 뿐, 레벨 사이의 불공평한 관계는 인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들은 오히려 자기 캐릭터가 하위 레벨 캐릭터를 ‘사냥’하는 게 자기 노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게임의 룰'에만 집착하면서 사회 현실의 '총체적 불공정성'에는 대체로 둔감한 것도, 이런 게임의 논리에 익숙해진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최근 윤석열 후보 부인이 학력과 경력을 위조 또는 과장한 사실들이 하나하나 드러나고 있지만, 윤석열 후보와 국민의힘은 이를 ‘하찮은 문제’나 ‘상투적 정치공세’ 정도로만 치부합니다. 그들은 조국 씨 일가에게 적용했던 ‘공정’의 기준과 자기들에게 적용하는 ‘공정’의 기준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다른 것을 ‘문제’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자기들이 인간을 사냥할 특권을 가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이런 종류의 믿음을 공유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5천원 어치 빵을 훔친 가난한 노인은 구속 기소하면서 자기 동료들에게는 ‘99만원짜리 불기소 세트’를 만들어 면죄부를 주는 검사, 쓰레기는 자기가 버려 놓고 제 때 청소하지 않았다며 아파트 청소원을 폭행하는 입주민 등은 모두 같은 ‘공정의 기준’을 가진 사람입니다.

“노동자들이 주당 120시간이라도 일할 수 있게 해야”,
“없는 사람은 부정식품 이하라도 사먹을 수 있게 해야” ,
“최저임금 이하로도 일할 사람 많다” ,
“손발 노동은 아프리카에서나 하는 것” 등

그동안 윤석열 후보가 내뱉은 말들은 동물적 생존 경쟁의 논리에 따른 공정관, 승자 독식 사회와 갑질 문화를 합리화하는 공정관, 경쟁에서 뒤쳐진 사람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공정관의 표현에 다름 아닙니다. 인류는 이미 여러 차례 함께 반성했지만, 이런 생각들이 현실적 힘을 갖는 한 반성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이제 다시 ‘동물적 생존경쟁 과정의 공정’이 아니라 ‘인간적 공정’ 또는 ‘인도주의적 공정’에 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사람답게 살 권리’가 있다는 원칙에 따라 공정의 기준을 재정립해야 합니다. 민주주의 시대에 공정의 기준을 정하는 건 ‘신의 뜻’이나 ‘과학적 법칙’이 아니라 시민들의 합의입니다. 인간 세상은 육식동물이 초식동물을 잡아먹는 동물의 세계여서도, 상위 레벨 캐릭터가 하위 레벨 캐릭터를 사냥하는 가상현실 공간이어서도 안 됩니다.

인간은 서로 경쟁하면서도 서로 연대하고 협력하는 ‘단일종’입니다. 경쟁 과정이 아무리 공정해 보여도, ‘인간 이상’의 특권을 누리는 자와 ‘인간 이하’의 삶을 강요당하는 자로 나뉘는 세상은 ‘인간의 세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이재명 후보는 늘 억강부약(抑强扶弱)’의 정의관을 설파했습니다. 그는 기득권자들이 ‘인간 이상’의 특권을 누리면서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에게 ‘인간 이하’의 삶을 강요하는 사회 현실의 총체적 불공정성을 완화, 해소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그는 우리 사회의 불공정한 ‘공정의 기준’을 바로잡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출발선 자체가 불공정하게 그려진 현실을 바꾸려는 개혁주의자이며, 경쟁에서 뒤쳐진 사람도 ‘인간답게 살 권리’를 누려야 한다고 믿는 인도주의자입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는 “어떤 공정을 선택할 것인가?” 라는 역사적 질문에 답하는 일입니다.

동물적 생존경쟁의 논리에 기반한 ‘비인간적’ 공정인가,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에게도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인도주의적’ 공정인가?

시민들 각자의 대답이 곧 다가올 우리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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